1990년 1월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가 <한겨레 신문>에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라는 글을 4회에 걸쳐 발표했다. 그는 식민 지배가 끝난 후 드러난 피해자 가운데 자기 또래 여성의 흔적이나 목소리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의아했다고 한다. 1980년 윤전 교수는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봉기씨를 일본 오키나와에서 직접 만났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일본은 물론 중국과 타이 등지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관련 증언을 수집했다.
국내에도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가 분명 있으리라 짐작됐다. 그해 11월 16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핵협의회(정대협)을 만들었다. 1991년 8월 14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김학순씨(1997년 작고)가 정대협을 통해 공개 증언에 나섰다. 해방된 지 46년 만에 도착한 이야기였다. 지금보다도 가부장적이고 이른바 '순결' 이데올로기가 뿌리 깊었던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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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930~1945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피해자를 약 8만~20만명으로 추정한다. 이 중 약 2만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정부 등록 피해자는 불과 240명이다. 여전히 더 많은 피해자들이 '목소리 없이' 살아 있거나, '이름 없이' 죽은 것으로 짐작된다. 2016년과 2018년 신규 등록한 피해자를 포함해 6월 4일 현재 생존자는 17명이다. 평균연령은 91세.
'시간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수사가 아니다. 피해 당사자 없이 운동을 이어가야 할 시기가 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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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감정과 민족주의는 운동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 '개인'들을 소외시키는 데 일조한 것은 아닌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문화연구자 엄기호씨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 2018)에서 한국 사회가 오로지 고통의 비참함에만 주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고통을 당하고서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으로서만 겨우 사회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를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로만 재현하는 일은 "그에게서 말도, 삶도 모두 박탈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 장일호 기자,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모색과 연대>, 시사인 vol.665 (2020. 6. 16.)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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