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과 12월, 논문이라는 쓰잘데 없는 글과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공쥬의 작은 생명 사이에서 나는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논문 심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읽은 바질의 무심한 듯 써내려간 산문 한 꼭지에서 내 마음은 떠내려 갈 듯 펑펑 울었다.
2017.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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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없이 유쾌하게, 진정한 무소유자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어느 날 우스꽝스러운 코를 가진 한 선량한 청년이 아름다운 초록의 자연을 방랑했다. 나무와 관목, 집과 농장을 지나쳐 가벼운 걸음으로 즐겁게, 유쾌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숲과 들판을 지나갔다. 얼굴 표정이 흐뭇하고 기분 좋아 보였으므로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매우 친절하고 밝게 인사를 건넸는데, 그건 청년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청년 역시도 인간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이 모든 생명체를 진심으로 선략하게 대하고 온 세상을 긍정적으로 따뜻하게 보는 인간이었다. 멀리서도 뭐든지 금방 눈치 채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누구에게나 "좋은 저녁입니다" 하고 인사했다. 저녁이 되면 이 아름답고 품위 있는 청년은 황금의 손과 황금의 눈동자로 집들과 나무들 사이를 조용히 돌아다녔다.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저녁에. 지금 청년이 풀밭을 지나는데, 송아지 한 마리가 청년에게 머리를 내밀면서 뭔가 애원하는 듯한 몸짓을 했다. 어쩌면 청년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청년에게 자신의 송아지 인생에 대해 들려주고 싶다는 행동인지도 몰랐다. "착한 짐승아, 나는 줄 게 아무것도 없어. 가진 게 있다면야 당연히 너에게 내주고 싶단다." 청년은 이렇게 말하고 계속해서 길을 갔다. 그러나 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머릿속에서는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 듯한 송아지의 모습이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 청년은 숲가의 규모가 큰 농장을 지나가게 되었다. 갑자기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요란하게 짖으며 달려오는 바람에 그는 순간 겁을 먹었다. 하지만 겁낼 일이 전혀 아니었다. 개는 그에게 풀쩍 뛰어올랐는데,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반가워서 그런 것이었다. 요란하게 짖는 것도 기쁨을 표시하기 위함이었으므로, 걱정이 된 마음씨 좋은 농부 아낙네가 저 멀리서 개를 부르면서 사람에게 그렇게 사납게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야단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착한 짐승아, 나에게 뭘 원하는 거니? 뭔가를 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어. 가진 게 있다면야 당연히 너에게 내주고 싶은데 말이다." 청년은 이렇게 말했고, 커다란 개는 너도밤나무 숲까지 청년을 따라왔다. 마치 그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청년에게 자신의 짐승 인생에 대해서 전부 들려주고 싶다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그러다 친구인 청년이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개는 따라가기를 문득 멈추고 자신의 본분이 있는 농가로 되돌아갔고, 청년은 방랑을 계속했다. 그러나 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청년은 친근하게 다가오면서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던 개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한참 뒤 어느 골짜기의 널찍하고 아름다운 길 위에서 청년은 염소 한 마리와 마주쳤다. 염소는 청년을 보자마자 다가왔고, 마치 우정이 그리운 인간처럼 자신의 비참한 염소 인생을 그에게 전부 털어놓고 싶어 하듯 그의 주변을 친근하게 맴돌았다. "착한 짐승아, 넌 나에게 뭔가를 원하는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어. 가진 게 있다면야 당연히 너에게 내주고 싶은데 말이다." 청년은 딱한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청년은 그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던 짐승들,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 했던 짐승들, 말없이 견디기만 하는 자신들의 존재와 답답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짐승들, 염소를, 개를, 그리고 송아지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언어를 갖지 못하고 말을 할 수 없는 짐승들, 인간의 필요 때문에 갇혀 평생 노예로 사육당하는 짐승들, 청년이 좋아했던 짐승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청년을 좋아한 짐승들, 마음 같아서는 청년은 그 짐승들을 기꺼이 데려가고 싶었으며 짐승들도 청년을 기꺼이 계속 따라왔을 터였다. 할 수만 있다면 청년은 그들이 좁디좁은 짐승의 왕국에서 벗어나 넓고 자유로운 세상,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기꺼이 도와주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이 드넓고 거대한 세상에서 나는 단지 가난하고 나약하고 무력한한 인간일 뿐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청년은 짐승들을 생각했다. 그 자신과 그의 친구들, 인간 친구들과 짐승 친구들 모두의 삶이 얼마나 암울한 상황인지를 생각하니 청년은 더는 앞으로 걸어갈 수 가 없었다. 그는 길옆의 풀밭에 누웠다. 그리고 가슴이 터지도록 펑펑 울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청년이여!
로베르트 바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산책자-로베르트 발저 산문집, 한겨레출판사, pp.7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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