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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구절들

프로젝트의 고독, 보리스 그로이스

by MIA_LeeQ 2011. 3. 11.

올해 창작스튜디오(레지던시) 사업을 맡게 된 이후 편두통이 생겼다. 
재미있는 사업은 하고 싶으나 예산이 전혀 없다는 가당치 않은 이 상황때문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외부의 지원금을 받는 것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유의 문화재단이 있으나 기금을 다른 문화재단에서 받아야하는, 따라서 선정되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지만
어쨋든 여러 방도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1월 말, 경기문화재단에 두가지 프로젝트를 신청하였다.
(엄밀히 말해서 내가 오롯히 쓴 프로젝트는 '우수예술프로젝트'사업 하나였지만.)
경기도 이천 시민들의 역사에 관한 나름 인류학적 탐색과정의 출판프로젝트였으나, 결국 낙방!! 
그러나 다시한번 기회가 왔다. 3월 18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레지던시 사업'이 그것이다.
이번엔 무조건 따내야하는데, 짱구를 굴려봐도 여기, 저기서 현실적 어려움이 뻥뻥 터지는 구료.

그러다가 보리스 그로이스의 글을 보았다. 나의 고민과 상황을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었다.
왜 구지 프로젝트를 머리아프게 만들고, 지우고, 고치는지.
예산이 없는 상황에서 그냥 편하게 오픈스튜디오나 하고 말면 될 것을.
굳이 왜 프로젝트인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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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의 고독, 보리스 그로이스

2010-11-29  

 

 

보리스 그로이스 (Boris Groys)

다양한 프로젝트의 진술은 현대 인류의 주요한 선과제가 되었다. 요즘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역에서 추구하는 어떤 노력이던간에 공공적 권위로부터 공식적 승인 혹은 프로젝트의 기금을 얻기 위해 적절히 프로젝트를 진술해야만 한다. 본래 형태의 프로젝트가 거절된다면, 곧 그것은 받아들여질 기회를 넓히기 위해 수정된다. 만약 수정한 프로젝트마저 거절되면, 그 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제안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지속적으로 끝없는 일련의 프로젝트들을 고안하고, 의논하고, 묵살하는데에 열중하고 있다. 평가는 기록되고, 예산은 세심히 계산되고, 의뢰는 만들어지고, 위원회는 지명되고, 결정은 검토된다. 현대의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제안서, 평가서, 예산들을 읽는데에 시간을 소비한다. 대부분의 이런 프로젝트들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는다. 이것이 요구하는 것은 프로젝트가 가능성이 없고 재정을 제공하기 어렵거나 혹은 단순히 가치가 없다고 보고할 그럭저럭한 평가관일 뿐이며, 프로젝트의 진술에 투자된 노동은 시간낭비가 된다.

물론 프로젝트의 표현에 투자된 업무의 정도는 상당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노동집약적이 된다. 다양한 심사위원과 위원회, 공공단체에 제출되는 프로젝트는 점점 더 적확하게 그들의 잠재적 평가자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정성어린 디자인으로 제시되고  그 어느 때보다 세심한 디테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이러한 프로젝트 표현 양태는 점차적으로 의당 예술형태에 앞서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프로젝트의 표현은 우리 사회에서의 중요성이 아주 미미하게만 인정받은 이의 노력으로 예술형태에 선행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실제로 실행되던 되지 않던, 각각의 프로젝트는 사실 미래의 특정한 환상을 위한 하나의 초안을 재현한다. 그리고 실행되던 되지않던, 매혹적이고 교육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문명이 끊임없이 생성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거절되고 나면 바로 사라지거나 단순히 버려진다. 예술형태로서의 프로젝트에 대한 괘씸하게도 무관심한 이러한 처우는 실로 매우 애석한 일이다. 이는 우리가 이러한 프로젝트에 투입된,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대한 더 큰 통찰을 제공할지 모를 미래의 희망과 비전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현대 프로젝트의 사회학적인 분석을 진행할 적절한 맥락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누군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은 그러한 프로젝트에 어떤 희망들이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혹은, 사람들은 대체 왜 프로젝트로부터 자유로운 미래를 살아가는 대신에 프로젝트를 하길 원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이 주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각각의 프로젝트는 사회적으로 승인된 고독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게다가, 어떤 종류든 계획의 결여는 우리가 즉각적인 상황들과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도록 강요하면서 우리를 불가피하게 세계 사건들의 일반적인 흐름, 종합적이고 보편적인 운명에 좌우되도록 한다. 이것은 지진, 대형화재나 홍수같은, 원칙적으로 계획없이 벌어지는 사건들의 경우에 주목할만큼 확연하다.이러한 종류의 사건들은 사람들을 가깝게 만들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조화롭게 행동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는 모든 종류의 개인적 불행ㅡ다리가 부러졌거나 바이러스에 쓰러지면 누구든지 즉각 외부도움에 의존하게 된다ㅡ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심지어 목적없이 부주의하게 흘러간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공동의 일과 오락의 리듬에 의해 공통의 유대로 묶여 있다. 일상의 주요한 조건 안에서, 언제라도 그들의 동료와 소통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지 않은 개인들은 어렵거나 반사회적이거나 불친절한 사람으로 간주되며,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승인된 개인적 프로젝트를 스스로의 고립과 모든 소통의 포기의 이유로 제시할 수 있다면 이러한 상황은 역전된다. 우리는 누군가 프로젝트를 해야 할 때에 그가 다른 무엇을 위한 어떤 시간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시간적 압박을 받으리라고 이해한다. 책을 저술하고, 전시를 준비하거나, 과학적인 발견을 하려 애쓰는 것이 그가 스스로를 파문하지 않는 한 사회적 접촉을 피하고 소통하지 않는 것을 허락하는 취미라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동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평가받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에 대한 (알맞은) 역설은 프로젝트가 길면 길수록, 그가 받는 시간적 압박 또한 크다는 것이다. 현재 예술계의 구조에서 받아들여지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최장 5년까지 계획된다. 대신에 한정된 은둔의 기간이 끝난 후 개인은 완성품을 보여주고 다시 사회적 소통의 난투 속으로 복귀해야 한다. 적어도 또 다른 프로젝트의 제안을 제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더불어 우리 사회는 과학이나 예술분야에서 한사람이 일생을 바칠지 모를 프로젝트들을 계속 받아들일 것이다. 지식 혹은 예술적 행위의 특정한 목표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이에게는 무한정의 기간동안 사회적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 허용된다. 그에게 기대되는 것은, 적어도 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가 고립으로 보낸 삶에 대한 사회적 정의를 제공할, 내세울 만한 완성품의 어떠한 종류, 즉 작업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모든 소통적인 동시대성에서 돌이킬 수 없이 떼어 놓고 외로운 프로젝트의 시간 속으로 옮겨 버리는, 종교나 더 나은 사회의 건설과 같은 시간의 제한이 없는 종류의 프로젝트들도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실천은 종종 집단적 노력을 요구한다. 한 프로젝트의 고립은 그렇기 때문에 빈번히 공유된 고립이 된다. 많은 단체와 분파가 영적인 발전이라는 종교적 프로젝트를 추구하기 위해 모든 소통적인 활동으로부터 침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나라들이 나머지 인류로부터 고통받았다.물론 이러한 모든 프로젝트들은 그들이 내세울 어떤 완성품도 갖고 있지 못하기에, 그리고 역사의 특정점에서 그들의 지지자들은 일반적인 소통에 재진입하기 위해 그들의 자발적 고립을 피했기 때문에, 다행히도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화(modernization)는 커뮤니케이션의 지속적인 확장, 모든 고독과 자발적 고립의 상태를 분산시키는 점진적인 세속화의 과정으로 널리 이해된다. 현대화는 모든 형태의 배타를 불가능하게 하는, 총체적 수용의 새로운 사회의 부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프로젝트는 모두 현대의 현상이다. 동등하고, 열려 있으며 완전히 세속화된 총체적 소통의 사회 또한 궁극적으로 여전히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각각의 프로젝트는 무엇보다도 먼저 선포, 세속화와 자발적 고립의 성취와 같은 것이 된다. 이는 현대성(modernity)에 반감이 병존하는 지위를 부여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총체적인 소통과 총체적이고 집단적인 현대성의 강요를 발전시킨다. 또 한편으로 이것은 반복적으로 근본적인 고립의 재정복으로 끝이 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이는 또한 우리가 고유의 언어와 미학적 아젠다를 고안한 역사적인 예술 아방가르드의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아방가르드의 언어는 하나, 그리고 모두를 위한 공동 미래의 약속으로써의 보편적 적용을 마음 속으로 계획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시대에, 그들은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의 소통적인 (자발적) 고립을 야기했고, 그렇기에 모두가 보도록 그들을 분명히 브랜딩하였다.

왜 프로젝트는 고립으로 끝나는 걸까? 답은 사실 이미 주어져있다. 각각의 프로젝트는 무엇보다도 다른 프로젝트의 선언, 일단 프로젝트가 실행되고 나면 다가올 새로운 미래이다. 그러나 그러한 새 미래를 유도하기 위해, 프로젝트가 이질적 시간의 평행상태로 그 동인을 전가함과 함께 누군가는 먼저 그 자신을 위해 떠나거나 부재하는 기간을 가져야 한다. 교대로, 이 다른 시간구조는 사회에 의해 경험됨에 따라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이는 탈동시화된다. 사회의 삶은 그와 상관없이 지속되며, 사물들의 일상적 흐름은 영향받지 않은 채로 유지된다. 하지만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어디에선가 이러한 시간의 일반적 흐름 뒤에서, 누군가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는 책을 쓰고, 전시를 준비하고, 혹은 테러리즘의 굉장한 행동을 계획한다. 그리고 그는 책이 출판되고, 전시가 열리고, 암살이 실행되기만 한다면 이 사물들의 일반적 흐름은 변할 것이고, 모든 인류는 다른 미래ㅡ사실 그 프로젝트가 예상하고 열망해온 바로 그 미래ㅡ를 전해받을 것이라는 희망속에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달리 말하자면, 처음에는 모든 프로젝트가 사물들의 일반적 흐름과 재일치할 수 있다는 희망 속에 오롯이 번창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 재일치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물의 흐름을 조종하는게 성공하면, 그 프로젝트는 성공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만약 이 사물의 흐름이 프로젝트의 실현에 영향받지 않은 채로 남는 경우에 실패로 간주된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성공과 실패 모두 그 성과가 프로젝트를 종결시키며, 일반적 일의 흐름과 시간의 평행상태의 재일치를 이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이 재일치는 친숙한 불쾌감을, 심지어는 실망감을 야기한다. 프로젝트가 성공으로 끝나는가 실패로 끝나는가는 무엇이건 간에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평행적 시간 속의 그 존재의 상실이고, 일반적 사물의 흐름에서 벗어난 삶의 포기이다. 

만일 누군가가 프로젝트가 있다면, 혹은 더 정확히 프로젝트 속에 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항상 미래에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여전히)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무엇을 작업하고 있다면, 그것은 숨겨진 것이고 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프로젝트는 그가 현재로부터 가상의 미래로 이주하는 것을 허락하며, 그 때문에, 다른 이들이 아직 이 미래에 도달하지 않았고 그 미래가 실현되길 기다리기에, 그와 다른 모든 이들 사이의 일시적인 단절을 야기한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작가에게 그의 프로젝트는 미래의 묘사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그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를 이미 알고 있다. 프로젝트의 동의과정이 작가에게 그리도 불쾌한 주요한 이유는, 부수적으로 제출의 가장 초단계에서 그는 이미 어떻게 이 미래가 이뤄질 것이며, 그 성과가 무엇일지 쫌스럽게 세세한 묘사를 하도록 요청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작가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프로젝트는 거절당할 것이고, 자금지원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실 이 인색하고 정확한 묘사를 전달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는 프로젝트 전체를 호소하는 그와 다른 이들 사이의 바로 그 거리를 제거하게 될 것이다. 만일 모두가 시작부터 프로젝트가 어떤 과정을 겪을지, 그 성과는 무엇일지 안다면, 그 미래는 더 이상 놀라움이 되지 못랄 것이다. 그와 함께, 프로젝트는 본래의 목적을 잃게 된다. 프로젝트의 작가에게는 이미 미래에 살고 있고 현재를 극복해야 할 혹은 폐지해야할, 최소한 바뀌어야 할 무엇으로 보고 있기에,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이 아무런 목적없는 것이 된다. 이것이 그가 스스로를 정당화해야할 혹은 현재와 소통해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와는 꽤 반대로, 프로젝트에서 선언된 미래에게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하는 것은 현재이다. 작가에게 프로젝트 속에서의 삶을 유혹적인 것으로 만드는, 반대로 프로젝트의 실행을 궁극적으로 망치는 것은 정확히는 이러한 시간차, 즉 미래로부터 현재를 바라보는 소중한 기회이다. 따라서 가장 수긍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은 처음부터 완성되지 않도록 계획된 것들이다. 이는 이것들이야 말로 불특정 시간동안 현재와 미래 사이의 간극을 유지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절대 완성되지 않으며, 마지막 결과를 생산하지도 않으며, 마지막 프로젝트를 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는 결코 이러한 끝나지 않고 끝날 수 없는 프로젝트들이 사회적 진술로부터 완전히 제외되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적이건 아니건 특정 결과의 어떤 방법을 통해 일반적 상황의 흐름과의 재일치에 영향을 미치도록 예상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이러한 종류의 프로젝트는 무엇보다도, 여전히 기록이 가능하다.

일전에 사르트르는 '과정 중인 프로젝트가 되는' 상태를 인간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개개인은 각자의 견지에 따라, 필요에 따라 다른 이들의 시선을 막으채로, 개인의 미래를 살아간다. 사르트르의 언어로, 다른 모든 이들은 한 사람을 결코 여러 상황의 이질적인 프로젝트로 보지 않고, 개인적 상황들의 완성된 제품으로 볼 뿐이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은 개개인의 근본적인 소외를 야기한다. 따라서, 프로젝트의 이질적이고 유사한 시간은 현재의 어떤 재현의 형식에서도 찾기 힘든 것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사르트르에게 프로젝트는 사회적 소통과 개인적 책임의 의도적인 회피, 현실도피의 의심에 의해 오명을 벗지 못한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주체의 존재론적 조건을 자기기만(mauvaise foi) 혹은 위선으로 설명하는 것이 놀랍지 않다.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 사르트르적 기원의 실존주의적인 영웅이 그의 프로젝트의 시간과 폭력적인 '직접행동'(action directe)을 통한 사물들의 일반적인 흐름의 시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도록 지속적으로 유도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짦은 순간을 위해서만 두 장면을 동시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이질적인 시간이 결론에 다다르지 못하는 동안, 그것은 이전에 관찰된 것처럼 기록될 수 있다. 심지어 누군가는 예술은 이러한 프로젝트에 기반한 이질적 시간의 기록과 재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예술은 세계의 구원을 위한 프로젝트로서의 신성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의 예술은 다양한 미래를 위한 개인적이고 집합적인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든 예술 기록은 이제 프로젝트들을 성공 혹은 실패로 몰지 않은 채, 현재의 모든 실현되지 않은 혹은 실현될 수 없는 프로젝트들을 승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 그 자신의 저작들 또한 이런 종류의 기록으로 간주될 수 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예술 프로젝트는ㅡ예술 작업 대신ㅡ예술계의 관심의 중심을 움직였다. 각각의 예술 프로젝트는 특정한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계획된 전략의 형성을 예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목표는 대부분 우리가 거절당한 방식으로, 프로젝트의 목표가 성취되었는지 아닌지,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 과도한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을 만든다. 그 목표가 본질적으로 도달 불가능한 것이더라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예술 작업을 포함한)작업의 생산에서 예술 프로젝트내의 삶으로 이동한다ㅡ본질적으로 생산적인 과정이며, 제품을 발전시키기 위해 재단되지 않은, '결과 중심적'이지 않은 삶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더이상 예술작업의 생산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프로젝트내의 삶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논의가 되고 있는 삶의, 혹은 그 삶이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결과와 관계없이 말이다. 이것은 분명히 현재 예술이 규정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예술은 더 이상 예술가에 의해 생산된 응시를 위한 새로운 사물로 드러나지 않으며, 그보다는 그렇게 기록되어진 예술프로젝트의 이질적 시간(time frame)으로 드러난다.

예술 작업은 전통적으로 직접성과 감지할 수 있는 가시적인 현존을 빌려주며 전적으로 예술을 구현하는 무엇으로 이해되어 왔다. 우리가 예술 전시에 갈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곳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 무엇이든 ㅡ회화, 조각, 드로잉, 사진, 비디오, 레디메이드 혹은 설치이든ㅡ예술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물론 이 작업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것들, 실제세계의 사물 혹은 특정한 정치적 이슈 등을 참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자체가 예술이기 때문에 예술 그 자체를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와 박물관 방문을 규정하는 관습적인 추측은 지속적으로 더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증명해왔다. 예술 작업을 제외하고, 현시대의 예술공간에서 우리는 점점 더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의 기록을 직면하고 있다. 유사하게,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림과 드로잉, 사진, 비디오, 텍스트, 설치ㅡ다른 말로, 예술이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같은 형식과 매체ㅡ를 본다. 그러나 예술의 기록에 있어서, 예술은 더이상 이러한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지 않고 단순히 기록된다. 예술 기록은 그 정의에 따라(per definitionem) 예술이 아니다. 정확히 예술을 참조함으로써, 예술 기록은 예술 그 자체가 더이상 우리 가까이 있거나 가시적이지 않으며 대신 부재하고 숨겨져 있음을 꽤 명확하게 한다.

그래서 예술 기록은 삶 자체를 직접적으로 참조하기 위해, 다른 말로는 원래 그대로의 순수한 행동 혹은 순수한 방식의 형태로, 아직 직접적으로 삶을 재현하길 바라지는 않는 예술프로젝트 내의 삶의 참조를 위해, 예술공간 내의 예술적 미디어를 이용할 시도를 암시한다. 여기서 예술은 예술작업을 비예술, 단지 삶의 예술의 기록으로 변화시키는 삶의 한 방식으로 변모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술은 예술적 수단을 이용해 삶 자체를 순수한 행동으로 생산하고 기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의 예술은 삶정치적인(biopolitical) 것이 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예술기록은 삶 자체가 기술적이고 예술적인 창조력의 목적이 되고 있는 우리의 삶정치(biopolitical) 시대의 조건 하에서만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삶과 예술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맞닥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무리 안에서, 예술 프로젝트의 겉모습에서 예술의 역설에 의해 특징지어진 그것은 예를 들면 단순히 삶을 재생산하거나 예술 생산물로 삶을 갖추려 하기 보다는, 이제 그 자신이 삶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마음 속에 떠오르는 평범한 질문은 어떤 면에서 예술 기록을 포함한 기록이 삶 자체를 재현할 수 있을까?

모든 기록은 멈출수 없이 오염된 삶의 보편적 의심 하에 있다. 각각의 기록의 행동과 아카이빙은 사물들과 상황들의 특정한 선택을 예상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언제나 의심스러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유지되는 기준과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게다가 무엇을 기록하는 과정은 기록 그 자체와 기록된 사건 사이의 차등, 이어질 수도 지워질 수도 없는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하고 전적으로 진실하게 삶을 재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가 아닌 삶의 데쓰마스크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것이 활력을 구성하는 삶의 독특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의 우리 문화가 기록과 아카이브에 대한 깊은 불안감, 심지어는 삶이란 이름 아래 아카이브에 대한 떠들석한 시위로 특징지어 진다. 직접경험보다는 죽은 문서들의 편집과 관리를 지지하는 가운데, 기록을 담당하는 기록자들과 관료들은 널리 실제 삶의 적으로 여겨진다. 특히, 관료는 삶을 회색의 단조롭고 특별한 일 없고 핏기없게ㅡ짧게 말하자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만들기 위해 기록의 으스스한 권력을 휘두루는 죽음의 대리인으로 인식된다. 마찬가지로 예술가 또한 기록에 참여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새로운 죽음의 대리인이란 의심 하에 관료와 결부지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 아카이브의 관료적인 서류들은 기록된 기억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으며,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프로젝트와 계획들을 포함한다. 이런 프로젝트의 아카이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러나 아마도 미래에 일어날 삶의 초안들을 포함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정치(biopolitical) 시대에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삶의 근본적인 조건들에 변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삶정치(biopolitics)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개개 생물체의 개조를 목표로 하는 유전자 조작의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전략으로 잘못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나 삶정치적 기술의 실제적 성과는, 지속 자체를 형성하는 것, 그리고 삶을 사건으로, 시간에 맞춰 벌어지는 순수한 행동으로 만들어 가는 것과 더 관계가 있다. 생식과 평생 건강관리의 대비부터 일과 여가, 의학적으로 통제되거나 혹은 의학적으로 유발되는 죽음 사이의 균형의 통제에 이르기까지, 현대 개개인의 삶은 영원히 인위적인 제어와 발전의 대상이다. 그리고 삶은 현재 더이상 존재의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사건, 숙명, 운명, 자체의 합의를 풀어내는 시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신 인위적으로 생산되고 형성될 수 있는 시간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삶은 미처 벌어지기도 전에 기록되고 서류화된다. 게다가, 관료적이고 기술적인 기록은 현대 삶정치(biopolitics)의 기본적인 도구의 역할을 한다. 계획, 규정, 조사보고서, 통계적 조사와 이런 종류의 기록을 구성하는 프로젝트 개요들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삶을 생성한다. 모든 생물체에 포함된 유전적 아카이브는 궁극적으로는 이 기록의 구성요소로 이해될 수 있다ㅡ 이전의 유전적구조와 구식 유기체 모두를 기록하는, 그러나 또한 같은 유전적 구조가 미래 유기체의 생성을 위한 청사진으로 해석되도록 하는 구성요소로 말이다. 삶정치(biopolitics)의 현재 상태를 고려할 때, 아카이브는 더이상 우리가 기억과 프로젝트, 과거와 미래를 구별짓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부수적으로, 기독교적 전통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 칭했던, 그리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범주에서는 '부흥'이라 알려진 것의 합리적인 바탕을 제공한다. 지난 삶의 방식의 아카이브는 어느 시점에서든 미래를 위한 대본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류로 아카이브에 저장됨으로서, 삶은 반복적으로 다시 존속될 수 있으며, 누군가 그러한 재생산에 착수하는 것을 결심한다면 역사적인 시간 내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다.  아카이브는 과거와 미래가 뒤바뀔 수 있는 장소이다.

예술프로젝트는 기록될 수 있다. 이는 예술프로젝트 내의 삶이 본래 인위적이고, 이러한 삶은 예술작업이 공간에 재생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시간에 맞춰 재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승인되고 성공적으로 끝마친 프로젝트들보다 완성되지 않고 실현되지 않은 혹은 초기에 거절된 프로젝트들이 "프로젝트 내의 삶"으로 현대 삶의 내부적 본질을 표현하는 데에 훨씬 더 적합하다. 다시말해 그러한 '실패한' 프로젝트들은, 궁극적으로 작가의 주관성에 초점을 두어, 우리의 관심을 프로젝트의 결과로부터 프로젝트를 완료하는 과정적 특성들로 이동시킨다. 끝마침의 불가능성을 다루는 예술프로젝트는 작가의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정의를 제공한다. 이런 경우에, 작가는 더이상 예술 오브젝트의 생산자가 아니라, 프로젝트 안에서 본인의 삶을 포함한 하나의 삶의 이질적인 시간을 기록하는ㅡ그럼으로써 권한을 가지는ㅡ사람이다. 그러나 작가는 허가의 측면에서 권한을 부여하는 권력을 가진 어떤 공공단체나 기관에 의해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실패의 가능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명쾌히 이를 기념하는 각자의 위험을 감수하는데에 주어지는 권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이러한 종류의 '프로젝트 내의 삶'의 승인은 또 다른 이질적이고 유사한 시간ㅡ가치있고 사회적으로 정당한 고독의 시간ㅡ을 열게 한다.

* 위의 글은 podopodo.net에서 가지고 온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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