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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 구절들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메모

by MIA_LeeQ 2020. 1. 1.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김연수의 책은 반정도는 주인공의 대학시절 로맨스가, 반 이후부터는 시대의 격변기에서의 개인들의 모습들에 집중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나와 연결된,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나를 이해해줄 어떤 존재를 평생을 걸쳐 기다리는 것. 그런 존재라고 믿었다가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실망하고 다시 찾으러 나가고. 인생은 아마 그런 행위의 반복 내지는 연속이 아닐런지. 

 

P.102

이처럼 지금의 사람들이 핸드폰, 블로그, 검색, 이메일 같은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사람들은 총격, 수류탄, 폭격, 사살 들의 단어에 노출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의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불행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행복과 불행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였다. 습관이란 무의식중에 행하는 행동을 뜻한다. 폭력이 몸에 밴 사람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하지 못함'이 그가 속한 세계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그런 세계에서는 제아무리 비폭력을 주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들의 몸은 폭력보다 비폭력을 더 불편해한다. 그걸 가리켜 현실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의 신문에서는 납치당하고 피 흘리고 관통상을 입고 잘려나간 육체들에 관한 기사들이 가득했ㄷ. 유럽에서는 혁명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고, 베트남에서는 매일 전투가 벌어졌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순수한' 개인이란 이테올로그들의 강변에 불과하므로, 함께 모여 그런 세계를 형성한 사람들이 자신이나 타인의 몸에 가하는 훼손행위에 지금의 우리와 같은 불편함을 느꼈을 리는 없다. 

 

PP.??-??

"... 밤마다 텅 빈 우주공간을 바라보며 우리만 살기에는 상당히 넓다고 생각해본 사람만이, 그래서 어딘가에서 날아올지도 모를 신호를 기다리며 전파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려본 존재만이 그 레코드판을 들어볼 생각을 할 거야. 그 레코드판이 금은방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해보면 간단하게 알 수 있는 문제지. 우리는 자신과 가장 닮은 사람과 연결되는 거야. 그날, 네가 내 목에 걸어준 목결이 말이야, 유리로 된 구두 한 짝이 달린 거였는데 생각나?

(...)

다 아니야. 그녀가 이를 악물며 참았으나,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건 득의만만한 표정, 가족 누구와도 공유해본 적이 없는 자신감이었을 거야. 자기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자의 표정 말이야. 그 장면은 항상 나를 위로해줘. 들어봐. 그건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기적이나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 있었고 이를 증명하는 작은 단서만 하나 있어도  나와 함께 그 시간을 공유한 사람은 끝내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아올 거란 얘기잖아. 칼 세이건이 쓴 <코스모스>으 ㅣ서문 맨 끝에 보면 '이타카와 로스앤젤레스에서'라고 씌어 있어."

(덧 : 정민은 칼 세이건의 아내 페넬로페가 좋아하는 오디세우스의 고향이 '이타카'라서 매우 로맨틱하다고 생각했고, 주인공은 코넬대학교에서 강의했던 이력으로 세이건이 지명을 적었다고 말했다. 나도 주인공의 의견에 한표;;)

 

P.123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그 반석이란 네가 스스로 말살시키 고유의 천성이며, 자식에 대한 사랑이고, 아내의 사랑에 대한 꿈이며, 네가 열여섯 살 때 가졌던 인생에 대한 꿈이다. 너의 환상들을 약간의 진실과 바꾸어라. 너의 정치인과 외교관들을 짐을 꾸려 떠나보내라. 이웃은 잊어버리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올바르게 생각하고 주의를 부드럽게 환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P.338

거기 떠 있는 달이 내가 존재하기 아주 오래 전부터, 나의 아버지가, 또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의 우리 모두를 꿈꾸고 있었다는 것이 한순간에 명백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저 달이 존재하는 한, 내 존재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P.374

어둠 속에 머물다가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빛에 노출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그 빛을 잊지 못하리라. 그런 순간에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됐으므로, 그 기억만으로 그들을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여행을 시작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다시 찾아오면서 그들을 습격하고 복수하지만, 그리하여 때로 그들은 사기꾼이나 협잡꾼으로 죽어가지만 그들이 죽어가는 세계는 전과는 다른 세계다. 우리가 빠른 걸음으로 길모퉁이를 돌아갈 때, 침대에서 연인과 사랑을 나눈 뒤 식어가는 몸으로 누웠을 때, 눈을 감고 먼저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몇 개의 문장으로 자신의 일생을 요약한 글을 모두 다 썼을 때, 그럴 때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는 몇 번씩 그 모습을 바꾸었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의 세계가 탄생했다. 실망한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 거대한 변혁의 시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자! 그들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그렇게 여러 겹의 세계이며, 동시에 그 모든 세계는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믿자! 설사 그 일이 온기를 한없이 그리워하게 만드는 사기꾼이자 협잡꾼으로 우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가 바로 우리에게 남은 열망이므로. 

 

P.378

"해진 티셔츠, 낡은 잡지, 손때 묻은 만년필, 칠이 벗겨진 담배케이스, 군데군데 사진이 뜯긴 흔적이 남은 사진첩, 이제는 누구도 꽃을 꽂지 않는 꽃병.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그럼 사물들 속에 깃들지. 우리가 한번 손으로 만질 때마다 사물들은 예전과 다른 것으로 바뀌지. 우리가 없어져도 그 사물들은 남는 거야. 사라진 우리는 대신해서. 네가 방금 들은 피아노 서선율은 그 동안 안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들었기 때문에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곡이 됐어. 그 선율이 무슨 의미인지 당시에는 몰라. 그건 결국 늦게 배달되는 편지와 같은 거지. 산 뒤에 표에 적힌 출발시간을 보고 나서야 그 기차가 이미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기차표처럼. 안나가 보내는 편지는 그런 뜻이었어.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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