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자리, 점유/업무, 그리고 그 자리와 직무에 부합하는 존재 방식에 따라 정의되는 안정된 집단들의 집합으로 보는 시각을 나는 치안의 논리 la logique pliciere라고 부른다. 치안의 논리에서는 전체가 부분의 총합과 동일해지며, 각 부분이 그에 합당한 몫을 갖는다. 또한 치안 논리에서는 전ㄴ체에 바깥이 없고, 실재가 외양과 명확히 구분되며,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것과 명확히 구분되고, 말이 소음과 명확히 구분된다. 반대로 정치의 논리 la logique politique가 있다. 정치의 논리는 부분들, 자리들, 직무들의 [치안적] 셈이 포함되지 않았던 보충적 요소의 도입으로 정의된다. 정치의 논리는 자리들의 나눔을 교란하는 동시에 전체의 생, 그리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나눔을 교란한다.
-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p.200
민주주의의 주체인 '인민 le peuple'은 주민의 총합이 아니라 인민이란 아무나의 능력, '실력없는 자들'의 능력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 Ibid, p.201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더니즘 담론들은 예술의 자율성, 작품의 예외성, 예술가의 개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예술의] 미학적 체제가 자율화하는 것은 작품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특정한 경험방식, 미적 경험이다. 미적 경험이란 예술의 형태가 그 속에서 지각되고 사유되는 틀이다. 미적 경험은 엄격한 의미에서 예술 작품들만을 고려하는 유일한 영역을 넘어선다. 미적 경험은 감각적 세계를 경험하는 다수의 형태를 훨씬 폭넓게 정의해준다. 감각적 세계는 실용적 관계의 질서에 국한되거나 선가 쾌적의 위계에 따라 조직되지 않는다. 미적 경험은 가능한 감각적 경험 세계를 정의해준다. 그 세계는 신체들과 그 신체들이 맡는 자리와 점유/업무에 부합하는 감각적인 것과의 관계맺음 형태를 정렬하는 나눔을 교란한다.
- Ibid, p.203
"자신이 마루판을 깔고 있는 방의 작업을 끝마치기 전까지, 그는 자기 집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방의 배치를 마음에 들어한다. 창이 정원으로 나 있거나 그림 같은 풍경이 내려다 보이면, 그는 일순간 팔을 멈추고서 널찍한 전망을 향해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인근 주거 소유자를 이상으로 그 전망을 만끽한다."
- 루이-가브리엘 고니, <도시야영 Campement Urbain>
(1848년 프랑스 혁명기간동안 노동자 저널에 실린 고니의 텍스트 후) 이 분리는 점유/업무와 유능을 연결하는 치안적 경제를 전복한다. 그것은 자신의 조건에 부합하게 보고, 말하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진 노동자 신체의 유기성을 해체한다. 그것은 [기존의] 자리, 직무, 느끼는 방식의 나눔에 더는 '들어맞지' 않는 노동자의 새로운 신체를 만든다. (...) 이 텍스트는 예술과 정치를 그것들 이편에서 연결하는 것, 즉 내가 감각적인 것의 나눔 le partage du sensible 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말한다.
- Ibid, p.204
(...) 소목장이는 상황에 대한 의식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열정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이르고 있다. 이 새로운 신체의 자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이런저런 예술 작품이 아니라 작품들의 새로운 전시 형태에 상응하는 시선의 형태, 다시 말해 작품들의 분리된 실존 형태에 상응하는 시선의 형태가 새로운 신체의 자질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하기로 하자.
- Ibid, p.205
미학은 경험의 형태, 가시성의 형태, 해석의 체제로서 존재한다. 이런 뜻에서 미적 경험은 예술작품의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 미적 경험은 공동체를 정의하는 감각적 풍경의 유동적인 분배를 번역한다. 감각적 풍경이란 곧 볼 수 있는 것과 겪을 수 있는 것,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어떤 분배를 뜻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정의하려고 시도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란 것이다.
- Ibid, p.214
연극에서 배우와 관객은 그 단어의 로마 어원이 가리키듯 각각 능동적인 행위자 actor와 수동적인 구경꾼 spectator을 말한다. 행위/인식과 보기의 구분이 연극에 뿌리깊이 박힌 것이다. 이러한 나눔에 답하는 몇가지 정식이 있다. 플라톤은 연극이 공동체에 끼치는 해악을 비판하며 연극을 폐지하고 무용 공동체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브레히트는 연극 안에서 배우와 관객의 동일시/정체화를 방해하고 관객이 '인식하는' 관찰자가 되도록 유도한다. 아르토는 관객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연극 안에 '참여'하여 생의 에너지를 얻는 구성원으로 만든다. 브레히트와 아르토의 방식은 대립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두 연극 개혁자는 모두 연극이라는 매개를 이용해 플라톤이 하고자 했던 것, 즉 관객을 능동적 존재로 변환하기를 이뤄내려 한 것이다.
- Ibid, p.218
<해방된 관객>에서 연극 개혁자들은 스펙터클의 악과 참된 연극-능동적 관객=행위자로 이루어진 살아있는 공동체 집단의 산출-사이에 사라지는 매개로서 연극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교육학 모델을 따른다.
- Ibid, p.219
연극개혁자들이 말하는 '거리(두기)'의 문제는 그것이 수동적 위치와 능동적 위치의 거리를 전제하면서 능력의 불평등 (계속 유지되는 거리)을 재생한다는 것이다. (...) 랑시에르는 이 '거리' - 브레히트처럼 거리를 두든, 아르토처럼 거리를 제거하든-를 극작가에 의해 극 구성 안에 배치된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위치 변환의 계기로, 작가에 의해 설치되었다가 사라져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는 "모든 소통의 정상적 조건"이다. (...) 작품 (여기서는 연극)은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공통된 것으로서, 사라져서는 안된다.
- Ibid, p.220
어떤 작업의 결과물 앞에 있는 자가 그 결과물을 전유하여 제 것으로 만들 때 해방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림이 있다는 사실에, 그림을 바라본다는 사실에 그 자체로 해방의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시선을 이끄는 가운데 해방이 있으며, 그것이 내가 관심을 갖는 측면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요컨대 "관객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읽거나 보거나 들은 것이 낳은 새로운 가능태들에 의거해 관객이 기존의 것을 변이시키는 조건들을 구축하는 것일 테다."
- Ibid,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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