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측정학적 융통성
사교성, 즉 '접촉을 만들어내고' 관계를 유지하며, 교환을 촉진하고 사회적 신진대사를 강화하는 능력이 현대사회에서는 "퍼서낼리티(personnalite)"의 증거가 된다. 소비, 지출, 유행 등의 활동 및 그것들을 통한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고독한 군중>에서 리스먼이 소묘한 것과 같은 현대의 사회측정학적 퍼서낼리티의 중심 중의 하나이다. 염려와 배려의 전 체계는 사실 개인의 지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버린 인간관계 체계의 일부를 이루는 기능화된 상냥함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와 유행의 사이클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사물 및 서비스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의미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아의 자율성, 성격, 고유한 가치에 근거한 개인적 원리에서 개인의 가치를 합리적으로 감소시키고 변동시킨 코드에 따라서 행해지는 끊임없는 *르시클라주(recyclage)의 원리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코드가 '개성화(personnalisation)'의 코드인데, 이것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타자와의 명시적 관계에서는 누구든지 이것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결정의 심급으로서는 '인격'이 소멸하고 개성화의 원리가 지배적이 된다. 그 결과 개인은 더이상 자율적 가치의 중심이 아니며, 유동적 상호관계의 과정에서의 다양한 관계의 한 항목에 지나지 않게 된다. '타인지향적인 인간은 어떻게 보면 모든 장소에서 건재할 수 있다. 그는 피상적이라 할지라도 누구하고나 재빨리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리스먼) 사실 이런 형의 인간은 일종의 사회측정학적(sociometrique)인 사회적 관계의 도표 속에 끌어들여져 기묘한 거미줄을 생각나게 하는 도표(적극적 또는 소극적, 일방적 또는 상호적 관계의 그물 속에서 개인 A,B,C,D,E를 연결시키는 선들)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의해 끊임없이 재규정된다. 요약하면 그는 사회측정학적 존재, 타자와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단순한 '이념적' 모델이 아니다. 이 자기에의 타자의 내재화와 타자에의 자기의 내재화는 제한없는 상호관계의 과정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에 관한 모든 행동(즉, 소비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여기서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자유'를 지닌 개별화된 주체도, 사르트르적인 의미에서의 '타자'도 존재하지 않고, 인간관계의 각 항이 그 차이적 변화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분위기'가 일반적이 된다. 이 경향은 요소로서의 사물이나 현대적인 인테리어 속에서의 그 사물들을 조합하는 경우에 확인되는 것과 똑같은 경향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유형의 사회통합에 있어서는 '순응주의(conformisme)'냐 '반순응주의(non-conformisme)'냐라고 하는 주네는 문제되지 않는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오히려 최적사회성(socialite optimale), 즉 타인, 다양한 사회적 입장, 직업과 가능한 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것(르시클라주, 무엇에라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 모든 수준에서의 사회적 이동에 순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장소에서도 '이동할 수 있고' 신뢰받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응할 수있는 능력이야말로 휴먼 엔지니어링(인간공학)
시대의 '교양'이다. 이렇게 해서 분자화된 인간들은 다양한 원가가를 가지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때에 따라서는 분해되어 조성을 바꾸기도 하고 구조가 복잡한 분자가 되기도 한다... 이 적응력은 '전통적인' 벼락부자나 자수성가한 사람의 승진과는 다른 사회적 이동에 대응하고 있다. 여기서는 자기 나름의 생활방식에 따라서 타인과의 유대를 끊어버리는 일이 없으며, 자신이 속한 계급과 결별하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도 없으며, 이례적인 초고속 출세를 하는 일도 없다. 모든 사람과 함께 이동하고, 기호가 엄격하게 배열되어 있는 위계제도의 코드화된 계급을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동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이동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일종의 인물증명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끊임없는 '동원(mobilisation)'의 강제이기도 하다. 더구나 모든 순간에 시험당하는 이 '융통성(comptabilite)'은 그 사람이 계량화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의미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을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총화, 자신이 가지는 '원자가'의 총화로서 구정된 개인은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항상 계량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계산의 한 단위가 되며, 사회측정학적 (또는 정치적) 프로그래밍 속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르시클라주(recyclage) : 학교 용어로는 '진학코스 및 전공의 변경','새로운 학업단계에 들어서는 학생에 대한 보충지도'를 뜻하는데, 보다 폭넓은 의미로는 교사, 기술자, 회사간부 등이 직업상의 새로운 지식이나 방법을 배우는 '재학습','재교육'을 가리킨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가 문화 및 자연에 대해 행하는 똑같은 조작에 대해서도 이 말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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