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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pisces 삶의 기록

시간의 향기 by 한병철

by MIA_LeeQ 2013. 12. 29.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서 시간이 정처없이 날라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마치 수증기가 공기 중에 증발하여 없어지듯, 부여잡고 싶어도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 그지 없는 상황과도 같다. 그렇게 방향성 없이 시간이 흐르고, 나는 중심도 잡지 못한채 기웃거리며 붕 뜬채로 하루하루 나이만 먹어가고 있다. 그런데 <시간의 향기>에서 저자 한병철 교수님에 따르면, 이런 나의 감각은 일종의 시대적 징후로 보인다. 중력이 사라진 현대에는 삶의 서사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누구나 파편적인 시간과 분산된 관심사에 둘러싸여 살게 된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양적인 활동성이 중심이 되는 활동적인 삶이 아니라 사색적인 삶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색적인 삶이란 다시 중심을 잡고 지속적으로 한가지에 몰두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고 이해하였다!^^). 그래서 나도 짧지 않은 앞으로의 삶을 위하여 내가 지속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사물이든, 일이든, 사람이든, 취미이든)만들어 놓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다음은 책의 몇가지 구절을 옮겨본다.

 

 

자유롭다 frei, 평화 Friede, 친구 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받침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오늘의 삶은 받침대가 없는 까닭에 쉽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시간의 분산은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개인의 시간 살림살이에서 짐을 덜어줄 안정적인 사회적 리듬과 박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더 다양화되는 경향이 개개인을 과도한 부담으로 짓누르고 과민 상태로 몰아간다. 따라야 할 시간 규정이 사라진 결과, 자유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 상실 상태가 초래된다.

-p.62

 

단선적인 세계 질서의 종언이 손실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존재 형식과 지각 형식이 가능해지고 또 필요해진다. 전진은 유영에 자리를 내준다. 지각은 인과적이지 않은 관계에 예민해진다. 엄격한 설별 작용을 통해 사건들을 좁은 궤도 위에 배치하는 서사적 선형성의 종말로 인해, 높은 밀도의 사건들 속에서 움직이며 방향을 잡아가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오늘의 미술과 음악도 이러한 새로운 지각 형식을 반영한다. 미적 긴장은 서사적 전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건들의 중첩과 조밀화를 통해서 발생한다.

간격이 짧아지면 사건의 연쇄는 가속화된다. 사건, 정보, 이미지 들의 조밀화는 머무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질주하는 듯 빠른 장면의 연속은 인간을 사색하며 머무르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망막을 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이미지들은 지속적으로 주의를 묶어두지 못한다. 이미지들은 그저 빠르게 시각적 자극을 흩뿌리고는 금세 퇴색해버린다. 본격적 의미의 지식이나 경험과는 반대로, 정보와 체험은 지속적이거나 깊은 영향을 남기지 못한다. 진리와 인식이라는 말은 어느새 낡아빠진 것 같은 울림을 지니게 되었다. 진리와 인식은 지속을 바탕으로 한다. 진리란 지속되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점점 짧아져만 가는 현재 속에서 진리는 빛을 잃는다. 인식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 속으로 데려와 묶어두는 시간적 집중에 의지한다. 시간적 연장성은 진리와 인식 모두의 특징인 것이다.

간격이 점점 짧아지는 것은 테크놀로지, 또는 디지털 생산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이러한 제품들은 매우 빨리 낡아버린다. 새로운 버전, 새로운 모델의 등장 때문에 제품의 수명이 아주 짧아진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이 혁신의 주기를 단축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강박은 아마도 아무것도 지속성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사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 완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온갖 버전과 변형만이 난무한다. 순수한 형식 유희로서의 디자인. 그렇다. 칸트적 의미에서 순수한 미, 즉 어떤 깊은 의미도 없이, 어떤 초감각적인 것도 없이 단순히 만족감만을 아는 아름다운 가상은 그 정의 속에 이미 부단한 교체와 부단한 기분 전환에 대한 요구가 담겨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기분"을 돋우고, 다시 말해 계속 주의를 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도 아름다운 가상에 지속성을 부여해주지 않는다. 어떤 의미도 시간을 제어하지 못한다.

-pp.72~74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비로소 노동에 삶의 필요성을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노동은 이제 신학적 의미 맥락 속에 편입되어 정당화되고 그 가치가 격상되기에 이른다. 루터는 직업으로서의 일을 인간을 향한 신의 부름과 연결시킨다. 캘빈주의에 의해 노동은 구원경제학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캘빈주의자는 자신이 구원받을지 또는 버려질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오직 자기밖에 의지할 데 없는 개인으로서, 향동에 있어 끊임없이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일에서의 성공만이 신에게 선택받은 징표로 해석된다.

(...) 프로테스탄티즘의 현세적 금욕주의는 일과 구원을 결합한다. 일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킨다. 일은 삶의 목표가 된다. 막스 베버는 경건주의자 친첸도르프(Zinzendorf)를 인용한다. "그저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다면 인간을 괴로움에 빠지거나 죽고 말 것이다." 시간 낭비는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악이다.  

-pp.143~145

 

순수한 활동성은 경험의 빈곤을 낳는다. 순수한 활동성은 동일한 것을 계속 이어간다. 멈추어 설 줄 모르는 자는 완전한 타자에 접근하지 못한다. 경험은 변신을 가져온다. 경험은 동일한 것의 반복을 중단시킨다. 더욱 활동적으로 된다고 해서 경험에 대한 수용성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특별한 수동성이 필요하다. 경험을 위해서는 행동하는 주체의 활동성에서 벗어나 있는 무언가의 다가옴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인간이든, 신이든, 어떤 것과 경험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우리를 맞히고, 우리를 덮치고, 우리를 뒤집어버리고 우리를 변신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Martin Heidegger, Unterwegs zur Sprache, p.159)

-p.167

 

사색적 머무름 또한 친절의 실천이다. 그것은 개입하기보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벌어지게 놓아두고 이를 승인한다. 사색적 차원이 완전히 빠져버린 활동적 삶은 친절하게 지켜주는 능력이 없다. 그러한 삶의 양상은 가속화된 제작과 파괴로 나타난다. 활동적 삶은 시간을 소모한다. 여가 시간 역시 계속 노동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조차 시간과 다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물은 파괴되고, 시간은 허비된다. 사색적 머무름은 시간을 준다. 그것은 존재를 넓힌다. 활동하는 것 이상의 존재가 되도록, 삶은 사색적 능력을 회복할 때, 시간과 공간을, 지속과 넓이를 얻을 것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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