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감정의 인지적 뿌리를 우리 뇌의 작동 방식에서 확인했다. 우리 뇌에서 미움을 관장하는 일련의 경로는 '미움 회로'라고 불린다. 미운 대상을 보면, 우리 뇌의 무리짓기와 구별짓기과 공격성 본능을 관장하는 시상하부가 자극을 받는다. 뇌섬/조가비핵/편도체가 따라서 반응하는데, 이 부위는 모두 변연계에 있다. 변연계는 진화적으로 좀 더 오래된 감정을 관장하는 곳으로, 한때 '파충류의 뇌'라고 불리기도 했다. 여기서 역겨움과 분노와 공포가 자극받는다. 반대로 이성을 관장하는 전두엽은 활동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 '미움 회로'는 '사랑 회로'라고 불리는 곳과도 상당히 겹친다. 우리뇌는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꼈을 때 무리짓기과 구별짓기로 대응한다(시상하부). 이렇게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고 나면, 내집단을 향해서는 사랑과 결속과 대규모 협력을 만들어내고('사랑 회로'), 외집단을 향해서는 분노와 공포와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미움 회로'). 우리 종에게 매우 중요한 협력과 결속의 기능이 작동하는 바로 거기에, 혐오와 배척의 스위치가 함께 내장되어 있다.
(...) ('협력'이라는 공동의 노력을 파괴하는 '배신자' 출현의) 딜레마를 뛰어넘는 힘 중의 하나가 외집단의 압력이다. 맹수로부터 집단 방어 체계를 구축하려면, 대형 동물을 사냥하려면, 혹은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끈끈한 결속이 필수다. 협력하지 않고 도망가는('배신자') 구성원이 많을수록 맹수나 다른 부족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외집단 압력에 맞서 살아남으려면 상방된 두 과제를 동시에 해내야 한다. 집단은 커져야 하고, 커지면서도 유대와 결속으로 묶여야 한다.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이 복잡한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유난히 큰 뇌와 복잡한 인지능력을 가진 종으로 진화했다고 본다. (...) 던바는 이걸 5명 내외의 가족부터 1500명 내외 부족까지 여섯 단계로 구분했다. 150명 내외의 공동체 단위가 4단계에 해당하는데, 다른 집단의 습격을 방어하는 도전에 필요한 단위다. 우리는 지금도 이 정도 숫자의 친구와 안정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이 숫자가 넘어가면 친밀감을 유지하는 걸 어려워 한다. 안정된 사회적 관계의 기준선으로 '150'은 '던바 넘버'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제 '수렵민채집민 회로'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인류는 외부의 위협을 인식할 때 안으로 결속하고 밖으로 적대하는 반응을 보인다.
(...)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 차별에서 출발하지만 곧 두 갈래로 나뉘곤 했다. 한쪽으로는 소수자가 보편적 존엄과 권리에 누락되지 않도록 '우리'의 범위를 확장하는 전략이 있다. (...) 이 갈림길은 거의 모든 소수자 정치에서 등장한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전설적인 지도자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있다. 그에게 흑인 문제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도록 되어 있는 보편적 존엄의 권리를 흑인에게까지 넓히는 문제였다. 이것은 미국을 파괴하거나 쪼개는 기획이 아니라 더 큰 미국을 만드는 기획이다. 또 하나의 전설인 맬컴 엑스는 (무슬림이자 흑인 운동가였던 그는) "나에게 섞인 백인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모두 증오한다"라는 말을 남긴 인종 분리주의자였다. 흑인의 권리를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유지하면서 흑인들끼지 살 때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크 릴라에게 정치란, '협력의 범위'를 확장하는 기획이다. 그럼으로써 더 어려운 과제를 공동으로 풀어냐는 기획이다. 정치란 우리가 개별로 환원되는 기본입자라는 세계관에 반대하여,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라는 걸 상기하는 일이다. "시민은 단지 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중 하나다." 여기서 시민은 보편적 존엄을 공유하고 지키는 연대의 단위다. (...) 소수저의 권리는 확대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소수자도 시민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체성 정치는 그 반대 방향으로 기운다. 그래서 릴라에게 정체성 정치란 진보 버전의 반정치다. (...) 그는 정체성 정치가 해결 불가능한 모순에 빠진다고 본다. " 정체성 진보주의자는 차이를 단언하고 특수한 경험과 욕구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돕는 정치적 행동을 나머지 사람들에게 촉구할 수밖에 없다. 정체성이 차이일 뿐이라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들의 요구에 반응할 이유가 있을까?"
(...) 정체성 차이를 강조하는 정치는 협력의 범위를 확장할 수 없다. 오직 우리 모두가 시민이라는 마음의 태도, 시민적 감정을 공유하는 것만이 협력의 범위를 확장하는 길이다.
(...) 마사 누수바움은 정치가 보편적 권리의 원을 확장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릴라와 의견이 같다. 우리의 편 가르기 본성을 뛰어넘어 그 원을 확장하려면 이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우리가 살펴본 진화인류학과 게임이론의 통찰과도 겹친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애국심, 동료 시민에 대한 사랑, 동정심과 같은 긍정적 감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동시에 누스바움은 그런 식의 감정이 분별없는 애국심과 당파적으로 기운 사랑에 흽쓸릴 위험을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는 정치체란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존엄을 평등하게 보장하고, 언제나 비판에 열려 있도록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열린 체제여야 한다.
천관율 기자, <편을 가를 것인가, 합쳐서 이길 것인가>, 시사인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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